‘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제노사이드’를 ‘대학살’ 또는 ‘집단 학살’로 번역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노사이드’는 무작위의 대규모 학살을 뜻하는 ‘대학살’과는 의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제노사이드’는 국민, 인종, 민족, 종교의 차이로 특정 집단이나 특정 종족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민족 대학살’에 더 가까운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의도적 목적을 갖고 특정 집단이나 종족을 학살하는 제노사이드가 대학살보다 더 잔인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2024년은 르완다 제노사이드가 발생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30년 전, 르완다에서는 무슨 이유로 특정 집단을 살해하는 제노사이드가 발생했을까요?
1994년 4월 7일, 역사상 최악의 비극
제노사이드로 홀로 남겨진 아동들이 모여 지내던 룬다 캠프
1994년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는 4월 7일부터 100일여 동안 이어지며 르완다 인구의 15%가 넘는 8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후투족과 소 수민족인 투치족의 갈등으로 시작된 대학살로 당시 르완 다에서 살고 있던 투치족 인구의 70%가 사라졌습니다. 사회 기반시설이 파괴되고 지역사회는 분열과 불신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당시 생존자들은 종말을 목격하는 것 같 았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르완다는 제노사이드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오랜 기간 내 전을 겪고 있었습니다. 후투족과 투치족, 두 집단의 서로 를 향한 뿌리 깊은 미움은 르완다의 아픈 역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르완다는 장기간 식민지배를 받으며 후투족 과 투치족이 나뉘게 되는 분할통치를 경험했습니다. 이후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으나 두 집단 사이에서는 국가 권력을 둘러싼 끊임없는 충돌이 이어졌습니다.
제노사이드 발생 하루 전날인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격추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날인 7일, 후투족은 투치족 핵심 인사와 온건파 후투족 지도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했고, 투치족을 향한 핍 박과 온갖 폭력 및 살상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100일여 동안 이어진 ‘제노사이드’는 80만 명 이상의 무고한 희생 자를 낳았습니다.
전대미문의 민족 대학살에 맞선 최대 규모의 인도적 지원
제노사이드 발생 후 르완다를 찾은 매리 로빈슨(Marry Robinson) 전 아일랜드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미닉 맥솔리(Dominic MacSoley) 전 컨선월드와이드 CEO
컨선월드와이드는 르완다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처참한 소식이 국제 사회에 알려진 직후, 컨선은 르완다에서 적극적인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컨선월드와이드는 르완다, 브룬디, 탄자니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인도적 대응에 착수했습니다. 1천 명 이상의 국내외 직원들이 수십만 명의 생존자들이 긴급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식량, 임시 거주지, 의료 서비스 등 지원에 매진했습니다. 컨선월드와이드 전 CEO이자 당시 인도적 지원을 이끌었던 도미닉 맥솔리 님은 “모든 게 어려웠고 무엇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라며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끔찍한 과거를 딛고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
2022년 6월, 사업 모니터링 및 사례가정 조사를 위해 르완다를 찾은 컨선월드와이드 한국
컨선월드와이드는 제노사이드 이후부터 지금까지 30년째 상처받은 주민들 곁에서 르완다의 회복과 극빈 졸업을 위한 노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컨선은 농업과 영양을 연결하는 혁신적 방법과 빈곤졸업 프로그램, 정책 옹호 활동을 통해 르완다 극빈층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컨선은 졸업생 지원 위원회의 공동의장을 맡으며 30년 동안 축적된 전문성과 경험을 지역사회와 나누고 있으며, 르완다 정부 대상 빈곤층 친화 정책 옹호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르완다 제노사이드는 인간의 존엄성을 뒤흔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남아 있으며, 르완다의 모든 세대가 깊은 상흔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니터링 조사를 위해 재작년 르완다를 방문했던 컨선월드와이드 한국 국제사업부의 이민희 과장은 직접 경험한 르완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르완다에서는 여전히 서로의 민족을 묻고 과거사를 꺼내는 일이 금기시됩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을 극복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제법 미소가 보였어요. 누구든 거리에서 만나 안부를 물으면 정겹게 대답해 주는 곳, 르완다는 매년 아물고 있는 중입니다.”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제노사이드’를 ‘대학살’ 또는 ‘집단 학살’로 번역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노사이드’는 무작위의 대규모 학살을 뜻하는 ‘대학살’과는 의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제노사이드’는 국민, 인종, 민족, 종교의 차이로 특정 집단이나 특정 종족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민족 대학살’에 더 가까운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의도적 목적을 갖고 특정 집단이나 종족을 학살하는 제노사이드가 대학살보다 더 잔인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2024년은 르완다 제노사이드가 발생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30년 전, 르완다에서는 무슨 이유로 특정 집단을 살해하는 제노사이드가 발생했을까요?
1994년 4월 7일, 역사상 최악의 비극
제노사이드로 홀로 남겨진 아동들이 모여 지내던 룬다 캠프
1994년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는 4월 7일부터 100일여 동안 이어지며 르완다 인구의 15%가 넘는 8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후투족과 소 수민족인 투치족의 갈등으로 시작된 대학살로 당시 르완 다에서 살고 있던 투치족 인구의 70%가 사라졌습니다. 사회 기반시설이 파괴되고 지역사회는 분열과 불신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당시 생존자들은 종말을 목격하는 것 같 았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르완다는 제노사이드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오랜 기간 내 전을 겪고 있었습니다. 후투족과 투치족, 두 집단의 서로 를 향한 뿌리 깊은 미움은 르완다의 아픈 역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르완다는 장기간 식민지배를 받으며 후투족 과 투치족이 나뉘게 되는 분할통치를 경험했습니다. 이후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으나 두 집단 사이에서는 국가 권력을 둘러싼 끊임없는 충돌이 이어졌습니다.
제노사이드 발생 하루 전날인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격추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날인 7일, 후투족은 투치족 핵심 인사와 온건파 후투족 지도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했고, 투치족을 향한 핍 박과 온갖 폭력 및 살상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100일여 동안 이어진 ‘제노사이드’는 80만 명 이상의 무고한 희생 자를 낳았습니다.
전대미문의 민족 대학살에 맞선 최대 규모의 인도적 지원
제노사이드 발생 후 르완다를 찾은 매리 로빈슨(Marry Robinson) 전 아일랜드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미닉 맥솔리(Dominic MacSoley) 전 컨선월드와이드 CEO
컨선월드와이드는 르완다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처참한 소식이 국제 사회에 알려진 직후, 컨선은 르완다에서 적극적인 대응을 시작했습니다.
컨선월드와이드는 르완다, 브룬디, 탄자니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인도적 대응에 착수했습니다. 1천 명 이상의 국내외 직원들이 수십만 명의 생존자들이 긴급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식량, 임시 거주지, 의료 서비스 등 지원에 매진했습니다. 컨선월드와이드 전 CEO이자 당시 인도적 지원을 이끌었던 도미닉 맥솔리 님은 “모든 게 어려웠고 무엇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라며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끔찍한 과거를 딛고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
2022년 6월, 사업 모니터링 및 사례가정 조사를 위해 르완다를 찾은 컨선월드와이드 한국
컨선월드와이드는 제노사이드 이후부터 지금까지 30년째 상처받은 주민들 곁에서 르완다의 회복과 극빈 졸업을 위한 노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컨선은 농업과 영양을 연결하는 혁신적 방법과 빈곤졸업 프로그램, 정책 옹호 활동을 통해 르완다 극빈층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컨선은 졸업생 지원 위원회의 공동의장을 맡으며 30년 동안 축적된 전문성과 경험을 지역사회와 나누고 있으며, 르완다 정부 대상 빈곤층 친화 정책 옹호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르완다 제노사이드는 인간의 존엄성을 뒤흔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남아 있으며, 르완다의 모든 세대가 깊은 상흔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니터링 조사를 위해 재작년 르완다를 방문했던 컨선월드와이드 한국 국제사업부의 이민희 과장은 직접 경험한 르완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르완다에서는 여전히 서로의 민족을 묻고 과거사를 꺼내는 일이 금기시됩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을 극복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제법 미소가 보였어요. 누구든 거리에서 만나 안부를 물으면 정겹게 대답해 주는 곳, 르완다는 매년 아물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