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선월드와이드의 CEO 도미닉 맥솔리는 40여 년 간 컨선월드와이드에서 극빈과 기아 문제 해결에 헌신한 인도주의 전문가입니다.
긴급구호팀, 국가 사업 책임자, 지역총괄 사업 책임자 등을 거치며 다양한 인도주의 현장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2013년 CEO에 선임된 그는 이제 2022년을 마지막으로 CEO의 자리에서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미닉은 얼마 전 은퇴를 앞두고 한국 사무소를 방문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컨선에서 함께 한 40년의 이야기를 듣고자 잠시 인터뷰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컨선 그 자체를 담고 있는 그의 삶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나눠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도미닉!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NGO 분야에서는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도 함께 말씀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컨선월드와이드의 CEO 도미닉 맥솔리입니다. 12월을 마지막으로 컨선의 CEO 자리에서 은퇴하기 전, 한국 사무소를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북아일랜드에 있는 ‘벨파스트’라는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간호사였어요. 저에게는 네 명의 남자 형제와 세 명의 여자 형제가 있는데요. 저의 네 명의 남자 형제는 모두 의사가 되었고, 여자 형제 중 두 명은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가족은 의료인 집안이라고 할 수 있죠. (웃음) 다른 한 명의 여자 형제는 선생님이 되었고 저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고민이었어요. 그래서 일단 법대에 들어가 법학 학사를 받고 졸업했을 때가 스물대여섯 살쯤이었는데, 그 당시에 저는 여행을 하고 싶었어요. 세상을 돌아다니며 보고 싶었죠.
그러던 중 컨선월드와이드라는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컨선을 알게 된 후 서너 달 후 저는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타게 되었어요.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 지역에서 캄보디아 난민들과 함께 지내며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컨선이 그곳에서 지원 사업을 크게 하고 있었거든요.
1983년, 태국-캄보디아 국경지역에서
컨선은 의료지원, 교육 및 직업 훈련 등을 진행했고 특히 저는 청년층을 위한 사업을 기획하는 일을 담당했어요. 난민 캠프에 있는 청년들은 직업을 구할 수 없었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컨선은 청년들을 위한 사무소(Youth Center)를 만들어서 운동, 재봉, 언어, 미용 기술 등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했어요. 우리 사무소는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았죠. 난민 캠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컨선의 청년 사무소는 일종의 희망과도 같았죠. 기회를 상징했어요. 그때 캄보디아 난민촌에서 청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던 일은 저를 NGO에 입문하게 해준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처음엔 컨선월드와이드의 봉사자로서 태국에 계셨던 것인가요?
그렇게 시작해서 40년이나 컨선과 함께하다니 정말 엄청난 인연인 것 같습니다!
처음 태국에 갔을 때 원래는 2~3년 정도만 일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봉사 기간이 끝날 때 컨선은 저에게 ‘다른 곳으로 가보실래요?’라며 제안을 했습니다. 매번 이런 제안을 받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컨선에서 40년이나 보내게 되었네요. (웃음)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 지역에서 봉사를 마친 뒤 저는 수단에 있는 에티오피아 난민 캠프에서도 일했습니다. 컨선은 수단에서 많은 사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저도 다양한 일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사막에 숙소를 직접 짓기도 하고요. 그땐 정말 더웠죠. 음식도 먼 거리에서 가져와야 했습니다. 전에 있었던 태국에 비하면 일하기 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저는 기꺼이 참여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좋은 기회이니까요.
컨선은 장기적인 개발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긴급구호도 진행하고 있는데요. 특히 저는 많은 긴급구호 현장을 경험했습니다. 코소보 위기 때 현장에 있었고 9.11 테러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에도 있었어요. 아이티 대지진 복구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현장에 가면 사람들은 막막한 재난 상황 앞에서 어떤 것을 해야 할지 몰라요. 함께할 사람들을 모으고, 숙소도 정하고, 하나씩 처음부터 다 스스로 하는 거예요. 만들어가는 거죠. 그렇게 도모해 나가는 점들이 저의 성격과 잘 맞았어요.
전 세계의 중요한 많은 순간에 그곳에 계셨군요!
그런 곳에 계시면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컨선과 함께 하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이라크에 있었을 때는 2일 동안 납치된 적도 있답니다. (웃음) 맞아요. 제가 컨선에 합류하게 된 이유보다는 계속 머물기로 정한 이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이제 컨선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일을 할 때 어떤 위험요소들이 있는지 알면서도 컨선을 선택했다는 것은 꽤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긴급구호를 할 때 정말 많은 국제기관들과 일을 합니다. 다 같이 미팅을 하기도 하고요. 그 과정에 함께하는 좋은 기관들도 많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은 기관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아온 저는 컨선이 매우 좋은 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수한 정책이 있고, 기술적 역량, 뛰어난 직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컨선 직원들은 우리가 떠난 뒤에도 지역 사회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현장에 가치를 남기고 떠난다는 것이죠. 우리는 항상 사업 대상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지역 사회가 연계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1980년대는 대상자 연계의 중요성이나 수평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았을 때였어요. 하지만 그때에도 컨선은 그 가치들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컨선은 아일랜드에 본부가 위치해 있는 기관인데요. 아일랜드의 역사는 피식민지배와 기근을 겪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역사와 비슷하죠. 그래서 우리는 억압의 고통을 알고, 아주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또한 우리가 많은 국가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요. 단순히 하나의 기관으로서 컨선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서 컨선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가난과 굶주림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이죠.
레바논의 사업 현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미닉 맥솔리
컨선에서 거의 40년 동안 근무하셨는데요. 도미닉께서 정의하는 컨선은 무엇입니까?
저는 공감, 전문성, 투명성 이 세 가지로 정의하겠습니다. 저는 사업 대상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에게 공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문성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전문성이란 단순히 의료, 교육 등 사업에 대한 전문성 뿐만 아니라 예산, 송금방식 등 운영적인 측면을 포함합니다. 투명성도 중요한데요. 단순히 후원금에 대한 투명성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지역사회와의 투명성도 중요합니다. 컨선은 지역 사회와 원활한 소통을 위해 기술적, 시간적으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피드백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죠.
컨선은 독특하고 전문적인 사업으로 유명한데요.
사업적인 측면에서 다른 NGO들과 컨선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가장 취약한 지역을 최우선으로 향한다는 것이죠. 설립 초기부터 컨선은 항상 가난하고 취약한 지역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때로는 그 지역으로 가는 데만 2~3일이 걸리는 곳도 있어요. 우리는 쉬운, 남들이 가는 곳을 가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곳에 집중합니다. 그것이 다른 기관과 컨선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통합적인 지원을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의 사업들은 마치 패키지처럼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 어떠한 재난에도 대응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지역에 집중하다 보면 여성과 관련된 많은 이슈들을 접하게 됩니다. 가난한 지역에는 항상 가난한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죠. 이들의 삶은 매우 취약합니다. 한 가지 예시로 컨선은 기후스마트농업 사업을 통해 가난한 여성 농부들과 함께합니다. 많은 여성들이 토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매우 적은 자본으로 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일랜드 최고 명문학교인 트리니티 대학에서 컨선 말라위에서 진행된 기후스마트농업 사업의 결과와 영향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특히 이 새로운 농법이 어떻게 여성의 노동력을 절감시켜 주는지 말이죠. 그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컨선의 농법을 통해 여성들은 일하는 시간이 1년에 34일이나 감소되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숫자죠! 풀을 베거나 웅크리고 앉아서 씨앗을 심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가난한 여성 농부들에게 34일은 그저 선물이 아니라 그들의 권리입니다. 그들은 그 34일을 노동이 아니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이티에서 만난 한 여성 농부는 남편을 잃고 세 아이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분은 컨선의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마을 사람들의 빨래를 돕는 일을 했습니다. 그녀는 마을에서 열리는 어떤 잔치에도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혼식이 열려도 입고 갈 옷이 없고 선물을 가져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녀는 항상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컨선의 ‘극빈 졸업 사업’을 통해 대출을 받고 자본이 되는 염소도 지원받았습니다. 그렇게 3년을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에 그녀는 자신만의 염소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나는 고개를 당당히 들고 마을을 다닐 수 있어요. 마을 잔치나 결혼식에도 참여할 수 있는 거죠.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이제 내가 마을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우받는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어요.
저는 이것이 바로 컨선이 추구하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것 말이죠. 컨선의 사업은 대상자분들에게 단순히 금전적인 지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긍지, 자부심, 자신감을 줍니다.
도미닉에게 있어 개인적인 측면, 직업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나요?
먼저 개인적으로 제 경력에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은 르완다 내전 이후 그곳을 가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있었을 때만 해도 저는 르완다의 상황이 제 일생 동안 결코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틀렸죠. 아직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경제적으로 많이 회복되었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국가 상황이 안심할 수 있는 단계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가 특히 국제적인 원조를 함에 있어서 현재 우크라이나, 시리아, 그리고 그 외에 여전히 굶주림이나 내전으로 고통받는 나라들을 바라볼 때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컨선에 근무하는 기간 동안 저에게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은 CEO로서 컨선의 사업장과 글로벌 사무소에 있는 직원들과 같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컨선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은 우리 조직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더 많은 책임을 질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 조직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컨선의 CEO에 지원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죠. 저는 얼마든지 각자가 있는 영역에서 더욱 높은 자리, 심지어 최고경영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컨선에서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셨는데요.
컨선에서 보낸 최고의 순간은 언제인가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에서 캄보디아 난민들을 대상으로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도 함께하며 그 과정을 돕는 일에 일부 참여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당시 유엔난민기구(UNHCR)의 송환 사업을 진행하는 굉장히 큰 버스에 제가 탔었고, 그들이 캄보디아에 돌아가는 순간에 함께 했던 것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이들은 15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매우 흥분하며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초조해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 역사적인 날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었기에 컨선 직원들이 그 순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아주 뜻깊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컨선에 대해 알기를 바라는 부분이 있을까요?
컨선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단지 규모뿐만이 아닌 우리가 양질의 사업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조직이 될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컨선의 비전에 맞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뽑고, 그것이 서로를 긴밀히 연결하는 조직의 모습으로 나타나 함께 우리가 하는 일의 퀄리티를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왜 조직을 더 키우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퀄리티의 향상 없이 조직만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난해 25개 사업국에서 직간접적으로 40만 명이 넘는 수혜자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 수는 실로 엄청난 수라고 생각합니다. 한 조직에서 한 일 치고는 굉장히 큰 숫자이며 양질의 사업이었기에 더욱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정말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고 계시는데요. 은퇴 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컨선 뉴욕지부에서 저에게 유엔의 특별대표직으로 와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이전에도 미국지부에서 10년 간 일했었는데, 그때 제가 했던 일이기도 하죠. 저는 CEO로서 은퇴 후 1월부터 뉴욕에 가서 맡겨진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컨선의 CEO 자리를 떠나는 것뿐 컨선을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굿바이 인사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웃음) 뉴욕에는 1년간 있을 예정이고 그 이후에는 그때 가서 고려해 보려고요.
저는 데이비드 리건이 컨선의 새로운 CEO로 합류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쁜 마음으로 환영합니다. 그는 1980년대에 기근이 발생한 후 에티오피아에서 컨선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는 기업에서 일했지만, 수년간 컨선의 이사회 의장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컨선과 연결되어 있었고 늘 컨선과 함께하길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후원자분들을 위한 마지막 인사를 부탁드려요!
금액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한국의 후원자분들께서 보내주시는 모든 지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후원금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내주신 후원금은 굶주림, 내전, 기후변화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극빈지역의 주민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생활비를 지원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후원금들이 극빈 지역 이웃들의 오늘을 살리고 내일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후원자분들께서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컨선이 수혜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때마다 그들은 늘 우리에게 다시 와줄 것인지 물어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더 한국의 후원자님들께서 보내주시는 후원과 지지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컨선월드와이드와 함께 세계 극빈지역 이웃을 향한 관심과 변화의 길에 동행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컨선월드와이드의 CEO 도미닉 맥솔리는 40여 년 간 컨선월드와이드에서 극빈과 기아 문제 해결에 헌신한 인도주의 전문가입니다.
긴급구호팀, 국가 사업 책임자, 지역총괄 사업 책임자 등을 거치며 다양한 인도주의 현장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2013년 CEO에 선임된 그는 이제 2022년을 마지막으로 CEO의 자리에서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미닉은 얼마 전 은퇴를 앞두고 한국 사무소를 방문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컨선에서 함께 한 40년의 이야기를 듣고자 잠시 인터뷰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컨선 그 자체를 담고 있는 그의 삶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나눠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도미닉!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NGO 분야에서는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도 함께 말씀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컨선월드와이드의 CEO 도미닉 맥솔리입니다. 12월을 마지막으로 컨선의 CEO 자리에서 은퇴하기 전, 한국 사무소를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북아일랜드에 있는 ‘벨파스트’라는 지역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간호사였어요. 저에게는 네 명의 남자 형제와 세 명의 여자 형제가 있는데요. 저의 네 명의 남자 형제는 모두 의사가 되었고, 여자 형제 중 두 명은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 가족은 의료인 집안이라고 할 수 있죠. (웃음) 다른 한 명의 여자 형제는 선생님이 되었고 저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고민이었어요. 그래서 일단 법대에 들어가 법학 학사를 받고 졸업했을 때가 스물대여섯 살쯤이었는데, 그 당시에 저는 여행을 하고 싶었어요. 세상을 돌아다니며 보고 싶었죠.
그러던 중 컨선월드와이드라는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컨선을 알게 된 후 서너 달 후 저는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타게 되었어요.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 지역에서 캄보디아 난민들과 함께 지내며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컨선이 그곳에서 지원 사업을 크게 하고 있었거든요.
1983년, 태국-캄보디아 국경지역에서
컨선은 의료지원, 교육 및 직업 훈련 등을 진행했고 특히 저는 청년층을 위한 사업을 기획하는 일을 담당했어요. 난민 캠프에 있는 청년들은 직업을 구할 수 없었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컨선은 청년들을 위한 사무소(Youth Center)를 만들어서 운동, 재봉, 언어, 미용 기술 등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했어요. 우리 사무소는 청년들에게 인기가 많았죠. 난민 캠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힘들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컨선의 청년 사무소는 일종의 희망과도 같았죠. 기회를 상징했어요. 그때 캄보디아 난민촌에서 청년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던 일은 저를 NGO에 입문하게 해준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처음엔 컨선월드와이드의 봉사자로서 태국에 계셨던 것인가요?
그렇게 시작해서 40년이나 컨선과 함께하다니 정말 엄청난 인연인 것 같습니다!
처음 태국에 갔을 때 원래는 2~3년 정도만 일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봉사 기간이 끝날 때 컨선은 저에게 ‘다른 곳으로 가보실래요?’라며 제안을 했습니다. 매번 이런 제안을 받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컨선에서 40년이나 보내게 되었네요. (웃음)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 지역에서 봉사를 마친 뒤 저는 수단에 있는 에티오피아 난민 캠프에서도 일했습니다. 컨선은 수단에서 많은 사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저도 다양한 일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사막에 숙소를 직접 짓기도 하고요. 그땐 정말 더웠죠. 음식도 먼 거리에서 가져와야 했습니다. 전에 있었던 태국에 비하면 일하기 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저는 기꺼이 참여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살아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좋은 기회이니까요.
컨선은 장기적인 개발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긴급구호도 진행하고 있는데요. 특히 저는 많은 긴급구호 현장을 경험했습니다. 코소보 위기 때 현장에 있었고 9.11 테러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에도 있었어요. 아이티 대지진 복구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처음에 현장에 가면 사람들은 막막한 재난 상황 앞에서 어떤 것을 해야 할지 몰라요. 함께할 사람들을 모으고, 숙소도 정하고, 하나씩 처음부터 다 스스로 하는 거예요. 만들어가는 거죠. 그렇게 도모해 나가는 점들이 저의 성격과 잘 맞았어요.
전 세계의 중요한 많은 순간에 그곳에 계셨군요!
그런 곳에 계시면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컨선과 함께 하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이라크에 있었을 때는 2일 동안 납치된 적도 있답니다. (웃음) 맞아요. 제가 컨선에 합류하게 된 이유보다는 계속 머물기로 정한 이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이제 컨선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일을 할 때 어떤 위험요소들이 있는지 알면서도 컨선을 선택했다는 것은 꽤나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긴급구호를 할 때 정말 많은 국제기관들과 일을 합니다. 다 같이 미팅을 하기도 하고요. 그 과정에 함께하는 좋은 기관들도 많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은 기관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아온 저는 컨선이 매우 좋은 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수한 정책이 있고, 기술적 역량, 뛰어난 직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컨선 직원들은 우리가 떠난 뒤에도 지역 사회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현장에 가치를 남기고 떠난다는 것이죠. 우리는 항상 사업 대상자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지역 사회가 연계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1980년대는 대상자 연계의 중요성이나 수평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았을 때였어요. 하지만 그때에도 컨선은 그 가치들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컨선은 아일랜드에 본부가 위치해 있는 기관인데요. 아일랜드의 역사는 피식민지배와 기근을 겪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역사와 비슷하죠. 그래서 우리는 억압의 고통을 알고, 아주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또한 우리가 많은 국가와 사람들의 도움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요. 단순히 하나의 기관으로서 컨선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서 컨선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가난과 굶주림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이죠.
레바논의 사업 현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미닉 맥솔리
컨선에서 거의 40년 동안 근무하셨는데요. 도미닉께서 정의하는 컨선은 무엇입니까?
저는 공감, 전문성, 투명성 이 세 가지로 정의하겠습니다. 저는 사업 대상자들과 연대하고 그들에게 공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문성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전문성이란 단순히 의료, 교육 등 사업에 대한 전문성 뿐만 아니라 예산, 송금방식 등 운영적인 측면을 포함합니다. 투명성도 중요한데요. 단순히 후원금에 대한 투명성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지역사회와의 투명성도 중요합니다. 컨선은 지역 사회와 원활한 소통을 위해 기술적, 시간적으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피드백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죠.
컨선은 독특하고 전문적인 사업으로 유명한데요.
사업적인 측면에서 다른 NGO들과 컨선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가장 취약한 지역을 최우선으로 향한다는 것이죠. 설립 초기부터 컨선은 항상 가난하고 취약한 지역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때로는 그 지역으로 가는 데만 2~3일이 걸리는 곳도 있어요. 우리는 쉬운, 남들이 가는 곳을 가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곳에 집중합니다. 그것이 다른 기관과 컨선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통합적인 지원을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의 사업들은 마치 패키지처럼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 어떠한 재난에도 대응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지역에 집중하다 보면 여성과 관련된 많은 이슈들을 접하게 됩니다. 가난한 지역에는 항상 가난한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죠. 이들의 삶은 매우 취약합니다. 한 가지 예시로 컨선은 기후스마트농업 사업을 통해 가난한 여성 농부들과 함께합니다. 많은 여성들이 토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매우 적은 자본으로 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일랜드 최고 명문학교인 트리니티 대학에서 컨선 말라위에서 진행된 기후스마트농업 사업의 결과와 영향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특히 이 새로운 농법이 어떻게 여성의 노동력을 절감시켜 주는지 말이죠. 그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컨선의 농법을 통해 여성들은 일하는 시간이 1년에 34일이나 감소되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숫자죠! 풀을 베거나 웅크리고 앉아서 씨앗을 심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가난한 여성 농부들에게 34일은 그저 선물이 아니라 그들의 권리입니다. 그들은 그 34일을 노동이 아니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이티에서 만난 한 여성 농부는 남편을 잃고 세 아이들과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분은 컨선의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마을 사람들의 빨래를 돕는 일을 했습니다. 그녀는 마을에서 열리는 어떤 잔치에도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혼식이 열려도 입고 갈 옷이 없고 선물을 가져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녀는 항상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컨선의 ‘극빈 졸업 사업’을 통해 대출을 받고 자본이 되는 염소도 지원받았습니다. 그렇게 3년을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에 그녀는 자신만의 염소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나는 고개를 당당히 들고 마을을 다닐 수 있어요. 마을 잔치나 결혼식에도 참여할 수 있는 거죠.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이제 내가 마을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우받는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어요.
저는 이것이 바로 컨선이 추구하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하는 것 말이죠. 컨선의 사업은 대상자분들에게 단순히 금전적인 지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긍지, 자부심, 자신감을 줍니다.
도미닉에게 있어 개인적인 측면, 직업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나요?
먼저 개인적으로 제 경력에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은 르완다 내전 이후 그곳을 가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있었을 때만 해도 저는 르완다의 상황이 제 일생 동안 결코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틀렸죠. 아직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경제적으로 많이 회복되었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국가 상황이 안심할 수 있는 단계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가 특히 국제적인 원조를 함에 있어서 현재 우크라이나, 시리아, 그리고 그 외에 여전히 굶주림이나 내전으로 고통받는 나라들을 바라볼 때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컨선에 근무하는 기간 동안 저에게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은 CEO로서 컨선의 사업장과 글로벌 사무소에 있는 직원들과 같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컨선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은 우리 조직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더 많은 책임을 질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 조직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컨선의 CEO에 지원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죠. 저는 얼마든지 각자가 있는 영역에서 더욱 높은 자리, 심지어 최고경영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컨선에서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셨는데요.
컨선에서 보낸 최고의 순간은 언제인가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에서 캄보디아 난민들을 대상으로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도 함께하며 그 과정을 돕는 일에 일부 참여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당시 유엔난민기구(UNHCR)의 송환 사업을 진행하는 굉장히 큰 버스에 제가 탔었고, 그들이 캄보디아에 돌아가는 순간에 함께 했던 것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이들은 15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매우 흥분하며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초조해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 역사적인 날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었기에 컨선 직원들이 그 순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아주 뜻깊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컨선에 대해 알기를 바라는 부분이 있을까요?
컨선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단지 규모뿐만이 아닌 우리가 양질의 사업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조직이 될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컨선의 비전에 맞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뽑고, 그것이 서로를 긴밀히 연결하는 조직의 모습으로 나타나 함께 우리가 하는 일의 퀄리티를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왜 조직을 더 키우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퀄리티의 향상 없이 조직만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난해 25개 사업국에서 직간접적으로 40만 명이 넘는 수혜자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 수는 실로 엄청난 수라고 생각합니다. 한 조직에서 한 일 치고는 굉장히 큰 숫자이며 양질의 사업이었기에 더욱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정말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고 계시는데요. 은퇴 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컨선 뉴욕지부에서 저에게 유엔의 특별대표직으로 와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이전에도 미국지부에서 10년 간 일했었는데, 그때 제가 했던 일이기도 하죠. 저는 CEO로서 은퇴 후 1월부터 뉴욕에 가서 맡겨진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컨선의 CEO 자리를 떠나는 것뿐 컨선을 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굿바이 인사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웃음) 뉴욕에는 1년간 있을 예정이고 그 이후에는 그때 가서 고려해 보려고요.
저는 데이비드 리건이 컨선의 새로운 CEO로 합류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쁜 마음으로 환영합니다. 그는 1980년대에 기근이 발생한 후 에티오피아에서 컨선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는 기업에서 일했지만, 수년간 컨선의 이사회 의장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컨선과 연결되어 있었고 늘 컨선과 함께하길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후원자분들을 위한 마지막 인사를 부탁드려요!
금액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한국의 후원자분들께서 보내주시는 모든 지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후원금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내주신 후원금은 굶주림, 내전, 기후변화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극빈지역의 주민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생활비를 지원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후원금들이 극빈 지역 이웃들의 오늘을 살리고 내일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후원자분들께서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컨선이 수혜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때마다 그들은 늘 우리에게 다시 와줄 것인지 물어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더 한국의 후원자님들께서 보내주시는 후원과 지지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컨선월드와이드와 함께 세계 극빈지역 이웃을 향한 관심과 변화의 길에 동행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