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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현장

콩고민주공화국과
컨선이 함께 걸어온 길

20년 이상 힘들게

컨선월드와이드가 처음 고마(Goma)에 도착했던 1994년 7월에 콩고민주공화국(DRC)은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였습니다. 자이르(참고: 콩고민주공화국의 이전 이름) 동쪽의 작은 시골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습니다. 왜냐하면 르완다 대량 학살의 여파로 수십 만 명의 피난민들이 근처 국경으로 피난을 왔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인종 차별로 인한 대량 학살에 연루되었고, 이 피난이 비극적인 분쟁의 시발점이 되어 콩고민주공화국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르완다 피난민들이 1994년 후반에 자이르의 고마로 향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

고마의 피난 캠프에서 활동하던 컨선 스태프들은 콜레라, 이질, 갈증 및 아사로 인한 고통과 죽음뿐 아니라 만연한 폭력과 어두움이 깊이 깔려 있는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컨선 CEO인 도미닉 맥솔리(Dominic MacSorley)는 "신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너무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몇몇 단체들은 소위 학살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힘들어했었지만, 컨선은 분명했습니다... 인도주의에는 객관성이 필요하다고요. 그 후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당시 르완다에서 가족과 떨어진 수백 명의 난민 아동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가족과 만나게 해주는 프로젝트가 주목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맥솔리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돌아왔으며, 카타르시스적인 경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이르의 고마 외곽에 있는 한 피난 캠프. 이 곳에서 컨선은 1994년 르완다 대학살로 피난해 온 사람들을 위해 긴급 구조를 제공했다. Photo: Concern Worldwide

가중되는 혼돈

그 후로 콩고민주공화국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르완다 대학살과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이 광대한 나라의 동부 언덕과 숲으로 피난을 갔고, 주변 국가들은 그 후로도 10년이나 지속된 피의 분쟁에 휘말렸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부상을 당하며 살 곳을 잃었습니다. 1998년부터 2009년 사이의 사망자 수만 5백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추산되고 있으나, 정확한 수치가 알려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나라는 넓고 미네랄 광물 자원도 풍부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가 그렇듯 풍부한 자원이 반드시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삶의 조건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콩고의 많은 부분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폭우로 몇 달 동안 접근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보건과 교육 같은 정부 서비스도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 현재 일인당 평균 소득이 1년에 500 달러 미만입니다.

고마 외곽을 순찰중인 MONUSCO BMP (MONUSCO: 민주콩고 주둔 유엔평화유지군), 2012년 7월. Photo: Sylvain Liechti/MONUSCO

하루하루 계속되는 몸부림

레이건 음부유(Reagan Mbuyu)는 7년 전에 고등학교 친구인 테레즈와 결혼했고, 자기 집에서 비옥한 땅도 소유하며 세 아이를 키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인종 사람들이 마을을 침략해서 집을 버리고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마노노(Manono) 임시 거처에 있는 레이건 음부유, 그의 아내 테레즈와 두